요즘 군대가 아무리 좋아졌다 한들 자식을 군에 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그 변화에 비례해서 평안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 부모나 다 아들을 병역에 바치지만 모든 부모의 심정은 각각이 새로울 수밖에 없다. 며칠 전부터 ‘내 아들이 군인 될 만큼 건강하게 성장했다는 것이 얼마나 크게 감사할 축복인가’라고 자위했지만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바득바득 다가오면서 늦둥이 외아들을 보내야 하는 마음은 조금씩 불편해졌다. 의연하게 아파트 현관에서 보내자던 우리 부부는 결국 아들을 논산까지 배웅하고 말았다. 그래서 다녀온 논산훈련소(지금은 육군훈련소라는 좀 더 세련된 이름이 붙었지만)는 그 위치만 빼고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한국시장경제포럼 회장

 황량하던 들판에 들어선 아파트들과 담장너머로 보이는 현대식 건물의 군 막사(요즘은 생활관이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바뀌었다)들은 북한의 김정일이 상하이 푸동을 둘러보고 천지개벽이라고 외쳤다는 그 마음을 이해하게 해 주었다. 더 큰 변화중의 하나는 사람이었다. 훈련소에서 마주치는 장병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하나같이 넉넉한 모습으로 잘 생겼는지.

나는 정확하게 41년 4개월 전, 바로 이곳에서 인간개조를 경험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인간개조는 악한 성품을 선하게 만들어 줬다는 긍정적 개념이 아니다. 당시 훈련소에 만연했던 일부 기간병들의 폭력과 갈취로 내무생활은 늘 긴장과 공포의 시간이었다. 떡처럼 진밥에 멀건 시레기국, 고춧가루로 대충 버무린 생배추로 그나마 부족한 세끼 식사를 하고도 감사가 나오면 고깃국을 배부르게 먹었다고 말해야 했던 군의 부패. 몇 년을 입었는지 모를 구멍 숭숭 뚫린 훈련복 사이로 칼바람이 밀려들어 늦추위에 떨던 빈곤의 현장. 이런 것들과 부닥치면서 그 때 나는 체념을 배우고 순응의 체질로 스스로를 바꾸는 인간개조를 경험했다.

그러나 육군훈련소는 더 이상 그렇게 암울하고 부정적 추억만 안겨주던 논산훈련소가 아니었다. 드넓은 주차장에는 입대 장병들을 태우고 몰려든 승용차들로 법석였고 보내는 사람들이 앉을 관중석 스탠드에는 곳곳에 컬러모니터가 걸려있었다. 비데까지 설치된 펜션급의 생활관 내부, 장병들이 먹게 될 하루 4,300칼로리의 식단(참고로 성인 남자가 하루에 필요한 에너지는 2,600칼로리다), 그리고 땀에 전 군복을 도맡아 빨아줄 거대한 ‘세탁공장’ 등 선진화한 훈련소의 모습들이 모니터 화면에 속속 등장했다. 뙤약볕 아래서 입소식을 치루는 빡빡머리 아들의 모습이 안쓰럽다가도 이런 풍요로운 시설과 “내 아들, 내 동생처럼 잘 돌보겠다”는 연대장의 말에 입소식 내내 눈물을 찍어내던 스탠드의 부모들은 큰 위안을 받고 있었다. (그 연대장의 낭랑하고 자상한 목소리는 정말 신뢰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그 순간 아들을 떠나보낸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어떻게 이 훈련소가 40여년 만에 이토록 감탄할 만큼 변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했다. 물론 기본적으로 국가의 경제수준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덕인데 그 중심에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자본주의가 있었다. 그리고 싫던 좋던,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나라경제를 이 만큼 키운 국가 지도자들의 헌신이 있었다. 또 그들의 정책에 순응해 고통을 분담해 온 국민이 있었고 도전을 실천한 기업인들과 땀 흘려 성취한 근로자들이 있었다. 만일 폐쇄적이고 민족지상주의를 주창하는 지도자가 대를 이어 이 나라를 통치하고 모든 국민이 경쟁대신 하향평준식 평등주의를 강요받아 왔다면 과연 육군훈련소가 논산훈련소 시대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 북한의 현 상황은 반면교사 교훈으로 그 대답을 웅변해 주고 있다. 그 나라처럼 되지 않기 위해, 바로 그 집단으로부터 자유경제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아들들을 군에 보낸다.

시장경제가 만능의, 그리고 완벽한 경제체제는 못 되지만 경쟁이라는 것이, 또 그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를 오늘의 육군훈련소는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 주변에는 그런 가치를 부정하는 사나운 집단들이 창궐하고 있다. 정치판을 비롯해 곳곳에 스며있는 숭북세력들은 6.25가 북침이고 천암함 폭침사건은 미제가 꾸며낸 자작극이라고 강변한다. 어린 학생들은 학교에서 전교조 교사들로부터 “자본주의가 재벌중심의 대미종속경제를 위한 방편이고 기업의 생산시설은 인민 공동의 소유이어야 한다”고 배우고 있다. 학교에서 그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군인이 될 때에도 이 나라는 온전히 지켜질 수 있을까. 과연 이 아이의 자식들이 군에 갈 때까지 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 이 번영의 혜택은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폐쇄체제로 쇠락해 가는 북한을 막는 것이야 이처럼 좋은 훈련소에서 교육받은 장병들의 몫이라지만 우리 내부의 이런 적들은 누가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민주주의를 지키고 시장경제 자본주의를 창달하는 것은 연병장 너머로 차츰 사라져 가는 아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손수건을 적시던 부모 친지들이 바로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제 집으로 돌아가 실천해야 할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