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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이도 배울 수 있다면’ 이규민 / 한국시장경제포럼 회장

일본 사상최대의 지진이 이 나라 땅에 연출해 낸 참혹한 형상도 놀랍지만 그런 암담한 현실에서 일본인들이 보여준 태도는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가족을 잃고, 집과 가재도구를 흔적도 없이 몽땅 잃었는데도 그들은 보는 이들에게 전율을 느끼게 할 만큼 냉철하게 현실에 맞서고 있다. 보도되는 TV화면 어느 곳에도 일본인들이 슬픔에 겨워 땅을 치고 통곡하거나 벽에 머리를 들이받으며 오열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일본이 아닌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 눈에 익숙한 장면은 이재민들의 원성과 무질서와 탐욕이었다

이규민/한국시장경제포럼 회장

재해를 당한 사람들은 견뎌야 할 불편을 거부한 채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고함을 지른다. 구호품이 도착하는 곳마다 사람들이 서로 밟고 밟히는 아수라장이 되고 이 아귀다툼에서 이긴 힘 센 사람들의 가족들만 배를 불릴 수 있는 게 상례였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조차 홍수가 뉴올리안즈를 휩쓸었을 때 약탈자들은 주인 잃은 상점의 풍성한 물품에 얼마나 환호했던가.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일본 사람들은 남을 원망하기보다 오히려 "해일 속에서 내가 손을 놓치는 바람에 딸을 잃었다"며 책망을 자신에게 돌린다. 모두가 몇 끼씩 굶었으면서도 태부족한 구호식품을 앞에 놓고 서로 나눠 주려는 모습은 낯설다 못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텅 빈 도시의 문 열린 상점에 물건들이 나뒹굴고 있지만 어느 곳에서도 약탈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없다. 일본인들은 도대체 인간의 본능과 본성조차 초월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필자가 언론에 근무할 때 경험했던 잊혀 지지 않는 몇 가지 좋지 않은 추억이 있다. 오래 전 얘기지만 경기도 북부지방에 홍수가 나서 언론사를 중심으로 구호운동이 벌어졌을 때의 일이다. 온 국민이 사랑의 마음으로 건네준 비상식량을 받은 한 이재민이 "아니 뭐 우리는 밤낮 라면 쪼가리나 먹고 살라는 말이냐"고 불평하는 장면이 TV를 통해 보도된 적이 있다.

어떤 이재민은 "누워 자려면 몸이 배기는데 담요만 주면 어떡하란 말이냐"며 흥분했는데 이 장면도 고스란히 TV전파를 탔다. 신문사에는 시민들의 비판 전화가 쇄도했다. "아니 우리가 그 사람들한테 고깃국 끓여주고 비단이불 깔아줘야 할 의무가 있나요"라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시민들의 구호품 기증이 끊어졌다. 마음속 갈등의 쓰나미가 돕는 자와 받는 자를 갈라 놓아버린 것이다.

또 다른 사례 하나. 어느 겨울, 제주시에 내린 폭설로 항공편이 마비된 적이 있었다. 공항은 귀향하지 못한 관광객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는데 흥분한 탑승 예약자들이 카운터로 몰려가 고함을 지르고 집기를 부수는 바람에 항공사 업무가 마비되었다. 결국 그 날 오후 눈은 다 치워졌지만 컴퓨터가 모두 박살이 나는 바람에 예약자들은 탑승수속을 하지 못해 항공기가 떠나지 못하는 코미디가 벌어졌다. 무질서와 화산 같은 감정이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았던 것이다.

도대체 일본사람들과 아닌 사람들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일본인들은 이처럼 자기 절제력이 강한 종족이 될 수 있었을까. 오랜 기간 역사속의 많은 시련과 고통의 경험이 오늘날 그들에게 강한 절제력과 질서의식을 부여했다고 분석하는 역사학자들이 있다. 그런 분석을 들으며 생각나는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 나오는 pathei mathos라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 지혜로워 진다'는 뜻의 이 말은 오늘의 일본인들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번에 일본인들의 이성적인 대처 행동을 보면서 우리가 남의 고통을 통해서나마 좀 더 지혜로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욕심도 부려본다.

이번 재해로 폐허가 된 일본 북동지역의 도시들은, 제2차 대전 때 원자폭탄을 맞았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일본은 그 같은 폐허위에서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을 건설했다. 큰 재앙을 맞은 일본이 이번에도 그 무서운 절제력과 용기로 역경을 극복해 머지않아 더욱 탄탄한 경제대국으로 거듭 나기를 기대한다.

'건너 집 잔디가 더 파랗게 보인다'는 미국 속담은 시기심을 담고 있지만 '옆집 잔디가 파래지면 이웃이 보기에도 좋다'는 일본속담은 건설적이고 이타적이다. 일본의 잔디가 하루 빨리 왕성하게 초록색으로 바뀌어 이웃 한국에 사는 우리의 마음도 편안해 지게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