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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 등록금, 반값 정치'

이규민 / 한국시장경제포럼 회장

미국대학들의 등록금은 대개 일 년에 3천만~4천만원 수준으로 우리나라 대학보다 훨씬 비싸다.

일반적으로 주립보다 사립이, 그리고 비명문보다 명문대학의 등록금이 비싼 데 그 격차가 매우 크다.

그래서 이 나라 학생들이 진학을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대학의 등록금이 얼마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다.

국민소득 수준을 감안해도 미국의 대학등록금은 우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비싸다.

이규민/한국시장경제포럼 회장

여기서 이런 가정을 한번 해보자.
어떤 학생이 미국의 명문대학에 합격했는데 입학하고 나서 슬슬 등록금이 비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변학생들을 선동해서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며 학생처장실을 부수고 총장실을 점거하는 난동을 부렸다. 또 그 도시에서 교통이 가장 번잡한 도심지 한 가운데를 막고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하자. 그러면 미국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그 학생이 청춘을 보낼 곳은 대학 강의실이나 도서관이 아닌 교도소나 정신병원이 될 것이다. 그것이 법치국가 미국의 상식이다.

한국에서 똑같은 행동을 하면 어떻게 될까.

과거 예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조용히 공부에 열심인 학생보다 무언가에 대한 투쟁을 주도한 학생들이 대학에서나 사회에서나 더 잘 나갔다.
학생들의 리더 노릇을 하고 미래의 정치지도자로서 수습과정을 받는 좋은 기회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창시절 그런 일에 몰두하던 사람들 중 적잖은 이들이 지금도 국회의원 혹은 시의원이 되거나 아니면 재야에서 그런 자리를 꿈꾸고 있다.

우리 유권자들은 그런 학생들에게 '벌'을 주기보다 '표'를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의 상식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평생 낙인찍힐 행위가 훈장이 되고, 어떤 선진국에서도 공직진출에 금기시되는 경력이 거꾸로 공직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대학시절 독재를 타도한다, 나라를 통일시키겠다는 등 '큰일에 바빠서 공부 같은 작은 일'은 구경도 못한 학생들이 무난히 학점을 받아 졸업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등록금 깎는 투쟁에 분주하고 학교법인화에 반대해 강의실 대신 총장실을 점거하느라 시험도 제대로 치루지 못한 학생을 훌륭한 성적으로 졸업장을 받는 대한민국은 참으로 너그러운 나라다.

대학을 휘저어 놓고 떠난 그 열혈청년들이 국회로, 시군구 의회로 진출해 이제는 대학이 조금 조용해지나 했더니 웬걸 대학과 정치권 양쪽이 모두 시끄러워졌다.
목소리 큰 선배들이 잘 되는 걸 본 후배학생들이 그 좋은 수련의 기간을 낭비할 리 없다. 정치권에 진출한 선배들은 교정에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이번엔 더 큰 목소리로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요즘 학원과 국회가 대학등록금을 놓고 2중창의 화음을 내고 있는 것은 양쪽에 그런 성향의 인물들이 많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을 덜어주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학생들이 등록금 걱정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등록금 부담이 덜어졌을 때 이 나라 학생들은 학업에만 전념하게 될까.

지금처럼 OECD국가 중 구매력 평가기준으로 두번째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도 반값등록금 촉구시위를 하느라 수업시간에 결석하기를 밥 먹듯 하는 학생, 어쩌다 출석해도 새벽까지 국가대사를 걱정하며 마신 술기운에 졸기나 하는 학생들이 있다면 그런 학생들이 과연 등록금이 내렸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철이 들어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될까,

아니면 그 까짓 몇 푼 안 되는 등록금 아까울 것도 없으니 더욱 열심히 투쟁활동이나 하려고 할까.
한국은 자동차 수리비가 인간 치료비보다 훨씬 비싸고 사설학원비가 대학등록금보다 월등하게 비싼 나라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등록 때만 되면 캠퍼스에서 투쟁의 이슈가 되고 선거 때만 되면 정치권에서 선동의 이슈가 되는 것이 대학등록금이다.
제값 다 내고 반값어치만 공부하는 대학생들이나 제값 다 받으면서 반값어치만 정치를 하는 정치인이나 딱하기는 매한가지다.

언제나 우리 시민들의 분별력이 높아져 이런 현상이 사라질 지 가슴이 먹먹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