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언론인포럼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방법'

이규민 / 한국시장경제포럼 회장

어렸을 때는 꿈을 먹고 살고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맞는다면 간직한 추억이 많을수록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최근까지 나에게 가장 자주 회상되던 추억은 20년 전 미국 콜로라도 주 ‘볼더’라고 하는 캠퍼스 타운에서 1년 동안 가족들과 함께 살며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멀리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힘차게 흐르는 로키산맥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낮은 구릉지에 엎드려 있는 인구 10만 여명의 이 작은 도시는 당시 40대 초반 나이의 필자에게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머릿속에 새겨준 곳이다.

귀국 후 명절이 되어 사람들이 온통 귀성하느라 법석일 때가 되면 서울 근처에서 태어나 딱히 갈 데가 없는 나에게 볼더는 마음의 고향처럼 다가와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단풍이 들어 하늘과 땅의 색이 변하기 시작할 때쯤이면 추억 속 콜로라도는 나를 부르는 듯 눈앞에 나타나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매년 가을만 되면 고향에 살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 비슷한 열병을 앓으며 살아왔다. 멈추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그렇게 열심히 달려오느라 그곳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지내야 했던 세월. 그래서 볼더는 내가 갈 수 없는 샹그릴라처럼 아주 먼 곳, 그리움 속에만 존재하는 향지 같은 곳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바로 그 곳을 지난 달 말 20년 만에 다시 찾았다. 세월의 흐름이 점점 빨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마음 속 초조함이 이 가을 나에게 결단의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떠나 집사람과 함께 찾은 볼더는 수십 년 지나도 변함없는 미국의 여타 도시들과는 다르게 눈부시게 성장해 있었다. 도심에는 못 보던 고층 건물들이 들어섰고 외곽에는 이름 모를 낯선 도시들이 동서남북으로 드넓게 연결되어 볼더는 나를 초행길처럼 낯설게 맞았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정리한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볼더에서 한가롭게 어슬렁거리기’였다. 볼더에 도착한 첫날 우리 부부는 아주 특별한 어느 식당을 찾기 위해 이 도시의 중심가 끝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20년 전 이 도시에서 보낸 마지막 날 저녁 식사를 했던 일본인 식당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스시 잔마이’라는 이름의 이 식당은 바로 그곳에 여전히, 더구나 퇴색의 흔적도 없이 곱게 자리 잡고 있었다. 평소 길눈이 어둡다고 나를 구박하던 집 사람은 내가 한 치도 머뭇거리지 않고 단박에 이 집을 찾아내는 것을 보고 놀라는 모습이었다. 내가 꿈속에서, 마음속에서 그동안 얼마나 자주 이 집을 찾았는지 집사람은 모른다. 그 만큼 이 일식당의 추억은 나에게 각별했다.

음식이 유난히 맛이 있어서가 아니다. 실내가 감탄할 만큼 호화로워서도 아니다. 당시 나는 서울에 사 둔 아파트의 중도금을 내기 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한 달에 1500달러의 연수비만으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래서 음식 값 비싼 일식당에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수가 끝나 떠나기 전 날 이삿짐을 모두 부친 뒤 나는 그렇게 벼르던 스시를 먹으러 이 집에 갔다. 네 살과 열 살짜리 아이 둘을 데리고 간 우리 부부가 주문한 것은 스시 2인분과 우동 한 그릇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궁상맞은 짓이었지만 그 때는 그게 당연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일본인 주인이 사케(정종)가 들어 있는 작은 호리병을 들고 왔다. 주문한 적이 없다고 하자 그는 일본식 영어발음으로 “Complimentary (선물)"이라고 짧게 대답하고 돌아갔다. 잠시 후 여 종업원이 접시에 고기 구운 것을 들고 와 "사케에 달려 나오는 안주"라며 테이블에 놓고 갔다. 그들이 호의를 베푸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초라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짐짓 의연한 표정으로 감사의 말을 건넸다. 그날 사케와 안주는 정말 맛있었다. 창밖 오렌지빛 가로등 아래 세워 둔 내 자동차가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에 덮여 서서히 형체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따뜻한 실내에서 정종을 마시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이었던지 나는 그 당시 감각들을 예민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식당에 같이 갔던 아이들은 지금 모두 성인이 되어 곁을 떠났고 이번에는 우리 부부 둘만 이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 당시 우리 테이블에 올려졌던 메뉴를 그대로 주문했다. "스시 2인분, 야키니쿠 한 접시, 우동 한 그릇, 사케 한 독구리..." 주문을 받던 여 종업원이 너무 많지 않겠냐고 물었다. “남으면 포장해서 갖고 갈 테니 걱정 말라”고 말하고 20년 전 가난한 학생시절 이 식당과 인연을 맺게 됐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사연을 들은 20대의 멋진 이 종업원은 반가움과 놀라움에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사라졌다.

아마도 그 녀가 주인에게 그 말을 전한 모양이었다. 낯익은 일본인 주인이 우리 테이블로 오고 있었다. 20년 만에 만난 그는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해 우리 부부를 놀라게 했다. “그 때 당신은 아이 둘을 데리고 저 창가에 앉아서 앞좌석의 아이들이 먹는 모습만 보고 있었다”면서 자신이 사케와 안주를 주었던 사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그가 친절을 베풀었던 이유를, 나도 묻지 않았고 그도 말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남은 음식을 포장해서 나오는데 작은 상자가 하나 더 달려 나왔다. 주인은 “집에서 개인적으로 만든 비매품 음식을 포장한 것”이라며 이번에도 “Complimentary”라고 말했다. 그는 말을 이었다. “20년 후에 다시 이 집에 찾아오라고 주는 선물”이라고. 이제 나는 오늘을 추억으로 남겨두고 먼 훗날 이 식당에 다시 오는 꿈을 꾸며 살아 갈 것이다. 젊어서는 꿈을 먹고 산다고 하니 나는 이번 가을 볼더에서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특별한 혜택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비록 실현될지는 알 수 없지만 꿈은 항상 사람을 기다림으로 설레게 만드는 마력이 있어서 좋다. 록키산맥의 만년설은 20년 뒤에도 변함없이 그곳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