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흑자의 이면'            김상철/ 한국시장경제포럼 회장           MBC라디오 ‘뉴스의 광장’ 앵커         한 사람 한 사람한테는 맞는 이야기인데 이게 전체 사회에 적용하려면 틀린 얘기가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운동 경기장에서 앞줄에 앉아 있던 사람이 더 잘 보겠다고 일어서면 필연적으로 뒷줄에 앉아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일어서게 되고 결국 모두가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는 현상 같은 것들이다. 이런 걸 흔히 구성의 모순 또는 구성의 오류라고 부른다. 경제학에서는 저축이 바로 그런 경우로 흔히 지목된다.

  저축을 나쁘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부를 축적해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결국 저축뿐이다. 저축은 미덕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워왔다. 사실 저축의 중요성은 항상 강조되어야 한다.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더 많은 공장과 농장이 필요하다. 공장을 새로 짓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이러한 투자 자본을 충당해주는 재원은 우리의 저축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저축을 장려했고 심지어는 강제화 한 적도 있었다.

 
   불황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데 가계 흑자는 사상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살림살이는 나아진 게 없지만 모두가 소비를 줄이고 내핍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가계 동향에 따르면 전국 2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명목소득은 419만원으로 지난해 같은 때 대비 1.7% 느는 데 그쳤다. 반면 명목 소비지출은 254만원으로 1%가 줄었다. 1분기 월평균 처분가능소득은 339만원, 저축능력을 보여주는 흑자액은 85만원에 달한다. 처분가능소득에서 흑자액이 차지하는 흑자율은 25%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사람들은 덜 놀고 덜 먹었다. 심지어 아파도 치료를 꺼렸다. 

 
  좋은 일로 봐야할 듯 싶은 데 반드시 그렇지는 못하다. 개인의 저축은 개인을 부유하게 만드는데 반해서 모든 사람이 저축을 하게 되면 사회 전체의 부를 증대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저축하기 위해서는 소비를 억제해야 한다. 한 사람이 저축하기 위해서 소비를 줄이면 그 줄어진 소비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수입이 감소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노년에 대비해서 매월 50만원의 저축을 시작하면서 영어 학원을 끊었다면 학원의 입장에서는 50만원의 수입이 줄어든 것이다. 한 사람의 소비 억제가 다른 사람의 소득 감소로 이어진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경제 구성원 모두가 저축을 많이 하고 소비를 줄이면 생산된 상품은 팔리지 않고, 재고로 쌓인다. 물건이 팔리지 않으니 생산자들은 생산을 줄이고 고용은 줄어든다. 경기는 침체되고 급기야는 불황으로 치닫는다.  이게 바로 저축의 역설 또는 절약의 역설이다. 

 
  저축의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는 저축한 돈이 투자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축이 투자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임금과 물가가 하락하고 총수요 증가로 인한 생산 증가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저축의 증대에 따라 기업의 투자는 더욱 위축된다. 일자리가 창출될 리가 없다.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노동시장이 아니라 경제 전체의 총수요의 부족이다.
 
  일본이 꼭 그랬다.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이후 소비를 살려 불황을 타개하겠다며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추고 세금을 깎아줬다. 고령자에게 상품권을 나눠준 적도 있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돈만 생기면 은행으로 달려갔다. 돈을 아무리 풀어도 돈은 다시 저축으로 돌아왔고 투자로 이어지지 못했다. 결국 내수가 갈수록 위축되고 경기는 살아나지 않아 '잃어버린 10년'은 '잃어버린 20년'이 되어버렸다.

  가계는 한 푼이라도 아껴서 저축을 늘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모두가 저축만 하고 소비를 않는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니 '소비가 미덕'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엔저 등으로 수출여건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이럴 때는 내수가 살아나줘야 하는데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