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스펀과 버냉키, 그리고 정치

                       감상철/ 한국시장경제포럼 회장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이 내년 1월 물러난다. 버냉키는 무려 18년동안 의장을 맡았던 그린스펀에 이어 지난 2006년부터 미국 중앙은행의 책임자자리를 맡아왔다, 지난 1927년부터 실시된 타임의 올해의 인물발표에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장이 선정된 것은 2009년 버냉키 의장이 처음이었다. 백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 의장을 지낸 사람은 버냉키를 포함해 모두 14명에 불과하다. 미국의 경제력이 압도적이 된 2차 대전 이후만 치면 8명이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의장은 51년부터 70년까지 무려 19년을 지내면서 독립성확보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윌리엄 마틴과 79년부터 87년까지 인플레시대를 맞아 정치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초고금리로 물가를 잡았던 폴 볼커, 그리고 87년부터 2천6년까지 재임했던 그린스펀정도 일 것이다. 책임과 권한이 전문적이어서 당연히 최고의 전문가가 필요할 것 같지만 역대 의장들 가운데 취임전에 이미 버냉키만큼 경제학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사람은 없었다.

   사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장이라는 자리는 철저히 비정치적이며 오로지 전문적인 지식이 중요할 것 같지만 꼭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받는다. 대통령에게 임명 권한이 있어 정치적 환경에서 자유롭지 않다. 버냉키를 임명한 사람은 공화당 부시 대통령이었다. 버냉키는 부시대통령 시절 공화당정부가 추진했던 부유층에 대한 감세정책을 지지해 민주당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었다. 부시대통령의 경제자문회의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민주당 카터 대통령이 지명했던 볼커나 공화당 레이건 대통령이 지명했던 그린스펀이나 다 당적을 갖고 활동했던 것은 마찬가지다. 사실 미국의 중앙은행이 물가안정보다 경기와 고용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흔히 레이건 대통령 시절 민주당원 볼커에서 공화당원 그린스펀으로 의장이 바뀌면서부터라고 한다. 당시 볼커는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완화를 반대했고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고금리정책을 유지해야한다고 믿어 규제완화와 감세, 작은 정부를 신조로 삼았던 레이건 대통령정부와는 충돌을 빚었고 결국 재신임을 받지 못했다. 반면에 당시 그린스펀은 취임전부터 공개적으로 규제완화를 비롯한 레이거노믹스에 대한 지지입장을 밝혔었다. 그린스펀은 당시 사회보장정책에 대한 비판에 앞장섰고 부유층에 대한 감세를 지지하기도 했다

   버냉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8년동안 미국 연준의 통화정책은 물가안정보다는 경기회복과 고용확대에 목표를 두어 운영되어왔고 버냉키가 나서서 정부의 재정지출확대나 재정적자를 비판한 적은 없었다. 지난 3년간 버냉키 아래서의 연준이 추진해온 양적완화가 두드러져 보이긴 하지만 사실 크게 보면 지난 30년동안 그린스펀에 이어 버냉키까지 미국의 중앙은행은 통화확대정책을 펼쳐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고용확대와 물가안정이 병립이 가능한 목표일까. 경제학 교과서에서 배우는 필립스커브는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은 경험적으로 상충한다고 가르친다. 버냉키 역시 스스로 실수를 많이 저질렀다.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이 확대되는 걸 예상하지도, 막지도 못했으며 당시 경제가 침체 기간은 짧아지고 빈도 역시 줄어들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캘리포니아의 부동산 거품에 대해서도 심상치 않다는 우려가 제기됐지만 버냉키는 오래된 얘기라면서 무시했다. 2천8년에는 당시 폴슨 재무장관과 함게 공적자금에 의한 경기부양대책을 의회에 요청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정부의 재정확대정책에 발을 맞춘 셈이다

   지난 2007년 금융위기 발생이후 미국 연방은행이 풀어놓은 돈은 어림잡아 3조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 3년간 공식적으로 미국경제는 경기침체에 빠진 적이 없다. 하지만 금리수준이 사실상 제로수준에서 이뤄진 일이다. 제로금리수준에서 이뤄진 성장을 정말 경기회복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지난해 말에는 공화당상원의원들이 나서서 공개서한을 통해 인플레이션 방지를 위해 양적완화 중단을 촉구했었다. 늘어난 유동성은 서서히 줄여놓지 않으면 인플레이션 위험이 높아진다는 건 상식이다.

   미국에 연방준비제도라는 조직이 생긴 건 1913년이다. 이사회는 의장과 함께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승인한 7명의 이사로 구성된다. 이들 7명과 12명의 지역 연방은행장들가운데 선출된 5명을 추가해 모두 12명이 공개시장위원회를 구성한다. 여기서 금리를 결정하게 된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은 공식적으로는 회의에서 한 표를 가질 뿐이다. 의장의 힘은 운영에 대한 집행권, 안건을 상정하고 의회와 정부에 연방은행을 대표한다는 위치, 그리고 논의를 주도하는 개인적인 능력에서 나오는 게 보통이다. 사실 버냉키의 양적완화종료에 대한 신호는 정치적 갈등의 결과일 가능성이 많다. 버냉키는 얼마 전 프린스턴 대학졸업식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했다. 일반적으로 정치인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비춰 정말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라고 믿는 일을 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라면서 결과가 잘못되는 건 나쁜 동기나 목적 때문은 아니라고도 말했다. 스스로에 대한 변명이라고 봐도 되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