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원점에서 재검토하자

 

                  이도선/ 전 연합뉴스 논설실장

 

    정부가 세제 개편안을 부랴부랴 손질해 다시 내놨다. 연소득 3,450만 원 이상부터 세금을 더 물리려던 당초 구상을 5,500만 원 이상으로 올리되 의료비, 교육비, 양육비 등에 대한 소득공제의 세액공제 전환과 신용카드 소득공제율 축소 등 나머지는 대부분 원안대로 간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하면 증세 대상이 434만 명에서 205만 명으로 축소되며, 연소득 5,500만~7,000만 원 구간은 세금 증가액이 원안의 연 16만 원에서 2만~3만 원으로 크게 경감된다. 정부가 제시한 최적의 조합이 그렇다는 얘기다.

 

   어쨌든 세제 개편안이 발표된 지 불과 닷새 만에 수정안이 나온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유리지갑’이 더 얄팍해진다는 소식에 부아가 치민 ‘넥타이부대’가 들고일어날 조짐이 엿보이자 때마침 국가정보원 국정조사 문제로 힘겹게 장외투쟁 중이던 야당은 뜻밖의 호재에 기세가 등등해졌고 여권은 아연 위기감에 휩싸인 결과다.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태는 쉽게 가라앉을 모양새가 아니다. 정부가 여전히 번지수를 잘못 짚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이 불경기에 봉급쟁이들 호주머니 털어 대선 공약인 복지 확충에 보태겠다는 발상부터 그렇지만 대통령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루 만에 내놓은 수정안도 마뜩찮다. 증세 대상 축소로 세수 증가액이 연 1조3,000억 원에서 8,600억 원으로 줄어드는데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은 것도 ‘급조된 미봉책’이라는 비난에 힘을 실어 주는 대목이다.

 

   중산층 기준이 모호한 것도 시빗거리다.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정부가 증세 기준을 대폭 상향 조정했다지만 연소득 5,500만 원으로는 중산층이라는 용어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게 항간의 평가다. 대학을 갓 나와 대기업이나 금융회사에 들어간 20~30대라면 몰라도 자녀 교육이나 혼사에 적지 않은 자금이 소요되는 중장년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너진 중산층을 살리겠다더니 되레 더 쥐어짜려고 작정한 것 아니냐는 의심마저 든다. 오죽하면 ‘세금폭탄’의 원조인 민주당까지도 ‘세금폭탄’ 운운하며 공세를 펴겠는가.

 

   순서도 틀렸다.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선후를 못 가리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먼저 가용 재원을 샅샅이 찾아보고 그래도 부족하면 국민에게 손을 내미는 게 순서다. 우선 전직 국세청장에게 3억 원이 넘는 거액의 취임 축하금을 건넨 곳이 CJ그룹뿐이고, 먹으면 청장만 먹겠느냐는 국민의 의구심부터 해소해야 한다. 이 사건으로만 미뤄 봐도 세금망을 빠져나가는 돈이 어마어마한 규모임을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변호사, 의사, 회계사 등 8개 전문직의 세금탈루율이 37.5%(2009년)에 이른다는 국세청의 추산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복지급여는 또 다른 골칫거리다. 감사원에 따르면 2010년 1월~올 5월까지 사회복지통합관리망 부실 운영에 따른 예산 낭비가 무려 7천여 억 원이다. 죽은 이에게도 기초노령연금이 지급되는 등 국민의 혈세가 펑펑 새고 있다. 전체 복지 예산에서 사회복지통합관리망이 차지하는 몫은 10분의 1밖에 안 된다지만 다른 복지급여들도 보나마나다. 비근한 예로 일할 능력이 멀쩡히 있으면서도 정부 지원금으로 놀고먹는 이들이 주변에 수두룩하다.

 

   이들 악덕 기업과 고소득자에 대한 철저한 과세와 복지 전달 체계 혁신만으로도 연간 수십조 원은 너끈히 복지 재원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노력도 없이 중산층과 서민층 지갑부터 넘봐서야 ‘창조경제’라고 할 수 없다. 가뜩이나 위축된 중산층의 소비여력을 훼손시켜 경기가 더 죽는다면 그야말로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경기를 살려 좋은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게 최상의 복지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러고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과제가 남는다. 박근혜정부는 지금 ’135조 원 대선 공약‘으로 자승자박한 채 옴짝달싹 못하는 딱한 모습이다. 복지 공약을 성역으로 두자면 증세는 필연이다. 아니면 재정 악화를 감수해야 한다. ‘증세 없는 복지는 환상’임을 직시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결코 현 정부에 못지않은 복지 공약을 내걸고 있는 민주당도 지금 상황을 마냥 즐길 입장은 못 된다.

 

   박 대통령은 결단해야 한다. 의욕 과잉의 복지 공약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것인가, 아니면 복지 확충을 위한 증세의 불가피성을 호소하고 국민적 동의를 얻을 것인가? 이런 근본 문제를 방치한 채 중산층의 신용카드 공제나 줄인대서야 변죽만 울리는 꼴에 다름 아니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쯤은 박 대통령도 능히 알 테다. '선거공약은 당선되는 순간 잊는 게 상책‘이라는 말도 그냥 하는 소리만은 아닐 것이다. 진짜 원점에서 재검토를 서둘러야 하는 이는 정작 박 대통령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