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하는 일이라는 게 대부분은 예측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오래전 국세청을 출입하던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호화생활자단속이라고 해서 가끔 국세청이 세무조사에 나서던 때였는데 해마다 단속의 초점은 조금씩 추가되거나 바뀌었다. 이 때문에 시즌이 되면 그걸 국세청은 보도자료로 내놓았고 언론은 이 자료를 받아 대대적인 보도를 하고는 했다. 하지만 시즌도 단속의 초점도 알고 보면 별다른 비밀이라고 할 게 없었다. 대개는 비슷한 시기에, 기존의 단속대상에서 약간의 수정을 한 채 단속계획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1년, 혹은 2년 전 기사가 나온 시점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최근의 뉴스에서 많이 다뤄진 현장만 몇 가지 추가하면 언제쯤 단속을 시작할지, 또 단속의 새로운 초점은 뭐가될지 쉽게 유추가 가능했다.

  정부가 올해 신 성장산업에 100조원을 투입하겠다고 한다. 이른바 ‘역동적인 창조경제’ 구현을 위해서다. 하지만 정책금융기관들은 지난해에도 똑같은 신 성장산업에 90조원을 공급했다. 같은 일에 10조원 더 쓰겠다는 것 말고는 사실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정부가 내놓은 투자 활성화 대책이란 것도 비슷하다, 판교 테크노밸리는 판교 창조경제밸리로 이름만 바뀌었고 나머지 대책들은 대부분 이미 하고 있거나 해왔던 일들을 더 열심히 하겠다는 정도다. 자금 투입규모 조금 늘리고 이름 바꾼 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를 비웃자는 게 아니다. 이제는 정부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정부의 역할에 대한 논의는 아직 정리가 끝난 문제가 아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지금도 정부가 신앙을 강요하고 누구와 사랑을 해도 되는지, 또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까지 강제하기도 한다. 정부가 국민에게 안전과 평화만이 아니라 일자리와 복지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그렇게 오래전부터 누구나 동의해온 얘기는 아니다. 정부가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해야한다는 발상도 백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정부가 때때로 실패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시장이 때로 실패하는 것처럼 정부도 실패한다. 다만 시장이 애초부터 작동할 수 없는 영역이 있듯이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정부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정부의 역할은 여러 가지 제약을 받는다. 관료집단의 한계도 있고 정보화, 세계화의 추세에 따른 한계도 있다. WTO의 규제와 국제적 협약은 정부의 정책적 자유를 구속한다. 글로벌 자금시장은 한 나라의 재정정책이나 금융정책의 효과를 상쇄한다. 여론과 민주적 절차, 이익집단의 압력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한계도 있다. 정부가 해야 할 바람직한 역할에 대한 논의는 상황에 따라, 또 시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의 바람직한 역할에 대한 논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정부의 능력에 대한 문제다.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는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정부의 능력을 벗어나 실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일이라는 여론 때문에 재원과 노력을 쏟아 붓는다면 자칫 헛수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 집 문제로 지금 온 나라가 끓고 있지만 정부가 앞으로 내놓게 될 대책이란 것도 대개는 미리 그림이 그려진다. 보육교사 자격증 취득 조건이나 시설기준 같은 건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재정지원을 늘리면 국공립 어린이집도 조금 증가할 것이고 보육교사에 대한 처우도 약간 개선될 것이다. 솜방망이 처벌 때문에 이런 일들이 자꾸 벌어진다는 여론도 있으니까 벌칙도 강화되겠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규제는 강화하고 재정지원은 늘릴 것이다. 그게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부가 규제와 처벌을 강화하고 재정지원을 늘리면 이런 일은 이제 일어나지 않을까. 그럴 리가 없다. 친부모에게서 학대받는 아이도 끊임없이 나온다, 인간이 모두 천사가 되지 않는 한 이런 일은 또 일어난다. 인간성을 바꾸는 것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일이 줄어들도록 최선을 다 하는 것 정도다, 그게 전부다.

  정부는 지금 많은 영역에서 민간과 경쟁하고 있다. 정부가 나아보이는 때도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은 은행이나 보험회사, 증권회사에서 운영하는 개인연금보다 수익률 면에서 훨씬 낫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제도 역시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것은 정부가 가진 여러 가지 제도적인 특권들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시장은 경쟁을 통해 정부보다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결과를 낳는다. LH공사가 지은 많은 아파트들이 입주민의 요구에 따라 LH라는 브랜드가 아니라 시공사인 민간기업의 브랜드를 쓴다. 브랜드 가치로 볼 때 공공부문은 민간 기업을 따라갈 수 없다. 공교육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부모들은 사교육시장으로 간다. 정부가 주관하는 수능이 제 구실을 못하면 대학들은 결국 다른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흔히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들 한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해서는 안 될 일인데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하고자 한다면 폭정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해줬으면 하지만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을 열심히 하는 정부는 착하다는 소리는 들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해줬으면 하는 일 들 중에서 실제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니 정부가 애를 써도 되지 않는 일이라면 다시 생각해 보는 게 낫겠다. 과연 정부가 정말 할 수 있는 일인지 말이다. 규제개혁을 얘기하는 것도 정부가 나서서 되는 일이 아니라면 오히려 정부가 손을 떼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은 정부냐 큰 정부냐 하는 논의는 실제로는 큰 의미가 있다고 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작은 정부냐 큰 정부냐가 아니라 유능한 정부다. 그리고 유능한 정부란 해야 하는 일들 가운데 정말 할 수 있는 일을 잘하는 정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