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일본에는 아베 총리처럼 성격이 뒤틀린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나라 지식인 가운데는 “식민지배의 피해를 입은 한국 국민이 그만하면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를 멈추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심지어 독도가 한국 영토라고 인정하는 일본학자들도 제법 많다. 그런 양식 있는 이들의 소신 있는 발언을 비판하는 일본인들이 거의 없다는 것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한국 사회 같으면 매국노라며 거친 욕설을 쏟아 부을법한데 그렇지 않은 것은 일본 사회가 그만큼 성숙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더라도 괴팍한 인물들이 내각을 이루고 있는 아베정권 아래서는 한일관계가 개선되기 어려울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다면 이 시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더욱 완고한 모습으로 일본을 증오하고 대립을 해야 하는가. 세계적인 지휘자 벤저민 잰더는 2차 대전이 끝나던 날 유대인 할아버지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지금부터 우리 가족은 독일인을 증오하는 말을 하지 말고 그런 글도 쓰지 말며 그런 마음조차 갖지 말라”. 의아해하는 가족에게 할아버지는 “독일이 우리의 미래까지 불행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면 가해자에 대한 증오심을 건설적으로 승화해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친 것이다.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후 111세까지 장수하고 돌아간 유명 여류 피아니스트 알리스 헤르츠 좀머는 “압제자들에게 원한을 품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증오는 증오의 대상보다 증오하는 이의 영혼을 좀 먹는 법이기 때문이다”라며 누구도 그 녀 앞에서 수용소 생활에 대해 말하지 못하도록 했다. 독일군에 의해 인종청소까지 당한 유대인들이 참혹한 과거를 높은 차원에서 극복하려는 철학을 나는 깊이 존경한다. 아울러 일제 강점기 생활의 고통을 경험한 한국인들도 그것을 본받기를 기대해 본다. 이들 두 유대인의 수준 높은 생각을 빌려 말한다면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미워한다고 해서 한국의 앞날에 무슨 이득이 있고 어떤 영광이 있단 말인가.

 만일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독립전쟁 전, 혹은 전쟁 중의 적대감과 증오심을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면 두 나라는 오늘날 세계의 지도자 국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인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일본에 관대해야 하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해왔다. 한국 사회에서 그런 주장을 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교활하고 잔인했던 식민시절의 일본을 두둔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과거를 부정하고 침략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본의 덜 성숙한 지도자까지 용납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일본 속담에 ‘아픈 상처 위에 소금 바른다’는 말이 있는데 일제 강점기 일본의 정치인들이 한국에 입힌 아픈 상처에 그 후배인 현 지도자들이 소금을 뿌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준엄하게 우리의 의견을 밝혀야 한다.

 단지 변함없이 악감정을 품고 사사건건 그들과 다투기만 해서는 절대로 일본보다 앞설 수 없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나는 일본을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적대감이나 시기심 대신 생산적 노력으로 세계 시장에서 일본을 추격하거나 추월한 우리나라 자동차회사들과 전자회사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과거 우리와 지배, 피지배의 특수한 관계였으면서 우리보다 앞서가고 있는 일본은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긍정적 자극제인가. 자기 나라의 역사를 합리화하거나 역사적 결과를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시각은 올바른 역사관이 아니다. 왜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는지, 미래에 그런 불행한 일을 다시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냉엄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분노와 규탄보다 건설적인 자세다.

 인류학자들은 한 세대를 30년의 시간으로 계산한다. 올해가 광복 70주년이니까 바로 우리의 자식들이 내 나이가 될 때 대한민국은 광복 100년을 맞게 된다. 우리의 후대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감과 증오심 속에서 성장하면 그들은 마치 분재한 소나무처럼 정신적 좀팽이가 되기 쉽고 균형 잡힌 지혜를 갖기 어렵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그 같은 부정적 사고에서 벗어나 열대우림의 나무들처럼 쭉쭉 뻗어가게 하려면, 그래서 광복100주년이 될 때 더 당당한 한일관계를 만들려면 우리의 자식들에게 용서와 관용을 가르쳐야 한다. 용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마음의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