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에 있는 기둥에는 “메덴 아간 Meden Agan”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고 한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흔히 솔론의 말이라고 전해지는데 “어떤 것에도 지나치지 않는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복수의 신, 네메시스는 지나침과 과도함을 경계하는 여신이다. 네메시스가 인간에게 신의 보복을 내리는 방식은 보통 그가 가진 약점보다는 장점을 이용한다. 과도함을 부추겨서 결국 그 과도함으로 인해 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셋째아들 김동선씨가 또 사고를 쳤다. 두 번째다. 한 주점에서 만취 상태로 종업원들을 폭행해 입건됐다.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그 아버지 김승연 회장은 종업원 보복폭행을 지시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었다. 이들만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동국제강 장세주 회장의 아들 장선익 이사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고 기물을 파손한 혐의로 입건됐었다.물론 아버지 장세주 회장 역시 해외 원정도박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운전기사를 상습 폭행하는 건 일도 아니다.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 정일선 현대 BNG스틸 사장, 몽고간장 김만식 전 명예회장이 모두 그랬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특히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공권력을 존경하지 않는다.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게 당연하지 싶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특이한 것은 범죄율은 매우 낮다는 사실이다. 기이한 일이다.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범죄는 흔한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들은 우리나라처럼 공권력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도 범죄율이 낮은 이유를 유례없는 경제성장과 독특한 가족제도에서 찾는다. 물론 경제성장이 범죄를 막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초고속 경제성장은 극단적인 소득 양극화를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가족은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못한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안전망 역할을 한다.

  그동안 불안한 노후를 책임지는 것은 연금이 아니라 잘 키운 자식이었고 대학을 나왔는데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 아이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그래도 조금 여유 있는 부모였다. 가족이 정부의 기능을 대신한 셈이다. 상황은 달라졌다. 한국 사회를 힘겹게 지탱했던 고도성장과 가족이라는 두 보호막은 사라져버렸다. 더이상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은 불가능하며, 가족이 사회안전망 기능을 대신할 수도 없다.

  정부와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여전한 상황에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그래서 범죄가 늘어나고 사회불안이 깊어지면 어떻게 될까. 예컨대 범죄가 늘면 늘어난 범죄로 인해 치안을 강화하고, 교도소와 안전설비를 늘리는 데 정부는 막대한 세금을 쏟아 붓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도 국민들은 여전히 밤거리 걷기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반기업 정서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다고들 얘기한다. 상당한 부분 그렇다. 하지만 “부자 되세요”가 버젓하게 텔레비전 광고에 쓰이는 덕담이자 인사인 나라에서 부에 대한 적대감이 어떻게 가능할까? 문제는 부의 획득과 분배가 공정한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믿음에서 온다. 신뢰의 부재는 한국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에 따르면 한국의 신뢰도는 지난 30년간 꾸준히 떨어졌다.

  어떤 기업도 정치 사회적 환경에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유리한 쪽이든 반대로 불리한 방향이든 기업 역시 사회적 산물이다. 굳이 전쟁까지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법질서가 유지되고 사유재산권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은 시장질서가 작동하기 위한 기본전제다. 범죄가 흔하고 치안이 불안한 사회에서 기업 활동이 제대로 가능할 리가 없다. 인력문제는 어떨까. 기업이 고용하는 인력은 국가와 사회가 애써 가르친 사람들이다. 제대로 잘 가르쳤다면 기업은 그 덕을 보게 될 것이고 반대로 그런 인력이 부족하다면 기업은 인력부족으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룩한 고도성장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 교육받은 많은 인구였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전통과 사회적 윤리 의식 또한 마찬가지다. 근면과 성실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문화적 전통이 있다면 기업도 그 덕을 보게 된다.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가 부패하고 관료조직 역시 뒷돈이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나라라면 기업은 그만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반대로 깨끗한 정치와 유능한 관료조직은 글자 그대로 기업경쟁력을 높인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누리면서도 정작 고마운 줄은 느끼지 못하는 게 땅과 공기와 물이다. 고마움을 알기에는 너무 소중한 것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알게 모르게 기업은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

  소득 양극화는 현실이다. 그 의미나 원인, 해결방법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고 논쟁은 계속되겠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하는 처지의 학생은 힘과 경제력이 있는 부모의 도움으로 다양한 인턴 경험에 해외연수까지 갔다 온 지원자와 공정한 경쟁을 하기 어렵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살았다고 해서 더 잘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있는 사람의 겸손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민도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